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21. 1/24]
줌파 라히리.
인도인의 외모, 벵갈어를 하지만 미국국적에 영어는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한다. 그러던 작가가 이탈리아어를 배워가는 과정들을 빼어난 비유와 묘사로 기록한 글이다.
인도의 벵갈어, 영어, 이탈리아어 사이에서 아시아계의 외모를 지닌 작가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이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배워온 우리들에게는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다.
그저 어렵고 고역이다 싶은 외국어 학습 과정들을 이렇게 서술할 수도 있구나 싶은 책.
아래는 책 속의 문장들.
"지난 스무 해 동안 난 그 호수 기슭을 따라 헤엄쳤던 것처럼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다. 늘 내 주된 언어인 영어 옆에 바싹 붙어서 말이다.
언제나 이탈리아어 기슭을 맴돌기만 했다. 연습은 많이 됐다. 근육을 키우고 두뇌를 회전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니. 하지만 분명 감흥은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외국어를 공부하면 그 언어에 빠질 수가 없다. 또 다른 언어가 늘 옆에서 받쳐주고 구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 깊숙이 들어가서 빠지지 않고 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빠져들려면 기슭을 떠나야한다. 구명대 없이. 뭍에서 팔을 몇 번 젓는지 세지만 말고 말이다."
-p13
"이제 이 작은 사전은 부모라기보다 형제 같다. 여전히 내게 필요하고 아직도 날 이끌어준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p18
"로마 이주를 준비하기 위해 나는 출발 여섯 달 전부터 더는 영어로 된 글을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때부터 이탈리아어로만 열심히 읽었다. 내 주된 언어에서 떨어지는 게 옳은 듯 했다. 공식적으로 영어를 거부한 것이다."
-p37
"새로운 단어를 만나면 결정의 순간이 온다. 당장 그단어의 뜻을 배우기 위해 잠시 읽는 걸 멈출 수도 있고, 단어에 표시를 한 다음 읽기를 계속해나갈 수도 있으며, 아니면 그 단어를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
나는 책 빈 공간에 단어의 뜻을 적지 않고 메모장에 목록을 만든다. 예전에는 단어의 뜻을 영어로 적었다. 이젠 이탈리아어로 적는다. 그렇게 나만의 개인적인 사전, 독서의 과정이 담겨 있는 나만의 어휘집을 만든다."
-p40
단어줍기
"매일 나는 바구니를 손에 들고 숲으로 들어간다. 사방에서 단어들이 보인다... 난 가능한 많은 단어들을 모은다. 하지만 그 단어들로는 충분하지 않은지 내 식욕은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다.
..
하루가 저물 때면 무거워진 바구니에서 단어가 넘쳐난다.
..
하지만 숲에서 나갈 때즘 바구니를 보면 겨우 단어 한 줌밖에 안된다. 단어 대부분이 사라진다.
..
왜냐하면 바구니는 바로 기억이고, 기억은 날 속이기도 하며 기억 안에 담긴 것을 지속시키지 못한다. 나는 모은 단어 모두와 연대감을 느낀다. 책임감과 함께 애정을 느낀다. 단어가 기억나지 않을 때 내가 혹시 그 단어를 떨어뜨린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
비록 나는 패배했지만 용기를 잃지 않는다. 패배했더라도 좀 더 마음을 다잡는다. 다음 날 나는 숲으로 다시 들어간다."
-p45
"이탈리아어에 비해 영어는 고압적이고 자신만만한 정복자 언어 인 듯했다. 이젠 그 심술이 도를 넘었고 난폭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어는 거의 일 년 전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꼈던지 내게 반감을 보였다.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책상 위에서 서로 맞붙었지만 승자는 벌써 명백하다. 번역 글이 본래 텍스트를 잡아 먹고, 그 위에 올라서고 있다.
..
이탈리아어를 지키고 싶다. 그래서 갓난 아기처럼 이탈리아어를 품에 안았다. 품에 안고 쓰다듬고 싶다. 아기처럼 이탈리아어도 잠자고 먹고 커야한다. 이탈리아어에 비해 영어는 다 큰 청소년, 털이 부숭부숭하고 냄새나는 청소년 같다. 저리가, 난 영어에게 말하고 싶다. 네 동생을 귀찮게하지 마, 자고 있잖아. 네 동생은 뛰어 놀지 못해. 너처럼 독립적이고 아무 근심없이 활기차게 뛰어 놀 수있는 소년이 아니라고."
-p97
"번역은 어떤 것을 읽는 가장 심오하고 친밀한 방법이라 고 생각한다. 두 언어, 두 텍스트, 두 작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참으로 아름답고 역동적인 만남이다. 분리이자 새로운 변화다."
-p99
"외국어는 섬세하고 예민한 근육과 같다.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진다."
-p104
"어느 순간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상점에 들어왔다. 나와 달리 남편은 미국인이었고, 모습으로 봐선 이탈리아 사람 같았다. 남편과 나는 점원 앞에서 이탈리아어로 몇 마디 나누었다.
..
계산대에서 돈을 지불하고 있는데 점원이 내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난 우리가 로마에 살며, 작년에 뉴욕에서 이탈리아로 이사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점원이 말했다. "남편 분은 이탈리아 출신이신가 봐요. 이탈리아어를 자연스러운 악센트로 완벽하게 말씀하시네요."
이것이 내가 건널 수없는 한계였다. 비록 내가 이탈리아어를 잘 익힌다해도 나와 이탈리아어 사이에 언제나 남아있을 벽이었다. 그건 바로 내 외모였다.
난 눈물이났다."
-p110
"내 인생 최초의 언어는 부모님 께 물려받은 벵골어였다. 미국 학교에 가기 전까지 4 년 동안 벵골어는 나의 중요한 언어였다. 다른 언어 즉 영어가 날 둘러싸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난 벵골어가 편했다. 나와 영어의 첫 만남은 힘들고 불쾌했다.
...
하지만 몇 년 후 영어를 읽을 수있게되자 벵골어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여섯 살 혹은 일곱 살 때였 다. 그때부터 모국어 벵골어는 더는 홀로 날 성장시킬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내 모국어는 죽었다. 새어머니 영어가 왔다. 난 새어머니 영어를 알고 해석하기 위해, 새어머니 영어를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었다."
-p118
문화유산답사기(4) -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21. 1/15]
사실 북한 문화유산은 실제로 볼 수 있을 날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선뜻 읽어볼 생각이 잘 나지를 않았다. 보거나 들어본 적도 없는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들에 집중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도 교수님 글들이 재미가 있고 단순히 문화유산 뿐 아니라 그 곳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어 시도해 보았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듯. 책이 쓰여진 것이 1998년이니 이미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북녁의 사람들 이야기는 순수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책 속의 북한 동포들과의 짧은 대화들 옮겨봅니다.
어서 빨리 문이 열리고, 북녘 땅으로도 신나게 자전거를 달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우리 비행기가 강하(降下)를 시작했습니다. 모두 걸상띠를 대 매어야겠습니다. 우리는 15분 뒤 평양 순안 비행장에 도착하겠습니다. 평양의 기온은 20도, 날은 개었습니다
-p30
곡이 끝나자 아나운서가 예의 힘찬 목소리로 곡명을 말해주는데, 나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라디오를 끄고 말았다.
"지금까지 여러분께서 들으신 음악은 교향악 '미제의 숨통을 끊어라' 였습니다."
-p32
"그렇지만 교수 선생, 오통로에 맞춰야 합니다"
"오통로라니?"
"거 뭐라고 하나.... 5번에 맞추십시오"
"아,아, 채널5! 알았습니다"
-p34
"방향적으로 말하여, 유적유물을 학술적으로 조사하고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최선, 최대로 보장하겠습니다"
북한의 말은 이처럼 우리와 단어사용법이 많이 달랐다. 순한글용어 못지않게 한자어를 이용한 조어도 많았다. 특히 '적(的)'이라는 접미사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방향적으로 말한다'는 표현이 꽤 자주 쓰였다.
-p37
"용강 선생, 나도 소장 아바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물론입네다, 아바이는 존칭입니다"
설명을 들으니 북한에는 '동무','동지','아바이'라는 호칭이 있다. 동무는 친구나 손아랫사람의 이름이나 직함에 붙이는 존칭이다. 과장 동무, 철수 동무는 낮춤이고 과장 동지, 철수 동지는 존칭이다. 그리고 동지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많으면 아바이가 붙는다는 것이다. 소장 아바이, 관리원 아바이, 부장 아바이...
북한에서 '님'이라는 어미가 붙는 것은 수령님, 장군님, 원수님 등 특수한 경우에 한하고, 나처럼 체제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이름이나 직함 뒤에 선생을 붙인다. 기자 선생, 의사 선생, 홍준 선생 등으로 부르는 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남한말의 씨, 영어로 미스터(Mr)에 해당한다.
-p90
(북한에서 일부 잘사는 집에서는 신부의 친구와 부모님을 모시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남의 신혼 여행에 뭐 하러 따라옵니까? 좋아서 왔습니까, 부러워서 왔습니까?"
그러나 처녀들은 부끄러움을 타는 듯 만세루 기둥 뒤로 돌아 숨으며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는데, 농담 잘하는 운석 동무가 한마디 했다.
"저런 걸 후천성 시집 매렴증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처녀들은 눈이 둥그레져가지고 일제히 소리친다.
"이야, 놀림이 심하다"
...
운석 동무가 또 농을 건다.
"교수 선생, 그만 가자요. 교수 선생처럼 처녀들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북조선에서 애들이 장난으로 만든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선천성 장가 고픔증이라고 합니다"
-p221
답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나는 유영구 차장이 선물로 준비해온 스타킹 하나를 얻어 안내강사에게 건네주었다.
"명화 동무, 고마웠습니다. 이거 별거 아닙니다. 서울서 올 때 스타킹 하나 사왔는데 받아주십시오."
"스타킹이라뇨?"
안내 강사는 부끄러운 듯 선물을 받아쥐고 가만히 포장지를 들춰보더니 가볍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살양말이군요."
-p287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21. 1/1]
Donald Hall이라는, 지난 2018년 89세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 2014년에 남긴 에세이.
원래 제목은 "Essays After Eighty"인데 번역하면서 바꾼 듯.
제목을 보고는 노년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해서 알라딘 중고에서 골라봤는데 물론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있지만 유머를 곁들여 쓴 본인의 회고록이 아닐까 싶다.
우리와는 문화와 역사가 다른 미국인이 쓴글이라 공감이 잘 가지 않는 부분도 많다.(예를 들어 시 낭송회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나로서는 경험도 없고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작가의 어린 시절 배경이 되어준 광활한 자연 이야기들도 그렇고.)
재치와 위트가 있다고는 하나 이 역시 언어가 다른 우리로서는 깊이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는 과연 저 나이에 어떤 과거를 회고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막막해지기는 하다. 뭐라도 하나 내세울만한 게 있어야할텐데.
책 속의 문장들 몇 점 남겨봅니다.
"아흔이 돼서 좋은 점 하나는 한 번 읽은 탐정소설을 2주 후에 또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등장인물 중 누가 범인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도,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해도, 별 수 없다. 노령이라는 세계는 미지의 우주이자 뜻밖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낯선 것이고 노인들은 별개의 생명체다.
...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들이 영원히 '타인'이라는 점이다."
마녀체력 ['21. 1/1]
아내에게 권한 책인데 내가 먼저 다 읽게 되었다. 운동과는 담을 쌓고 있던 저자가 마흔 넘어 운동을 시작하고, 결국은 철인 경기까지 즐기게 된 과정에서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풀어 낸 이야기들.
꼭 여성이 아니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고,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자전거 이야기도 자주 등장해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이제 곧 10년째를 바라보는 나의 개인 자전거 역사도 새해에는 뭔가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 우선 코로나가 좀 나아져 설악, 백두 대회라도 좀 열렸으면.
아래는 책 속의 문장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가 쓴 "프레임"에는 '조명효과'라는 심리 현상이 나온다. 우리는 연극 무대의 주인공이 아닌데도 마치 스타들처럼 머리 위에 조명을 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다른 사람들 시선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쓴다는 말이다. 한 학생에게 이상한 얼굴이 그려진 민망한 티셔츠를 입힌뒤, 다른 학생들이 기다리는 실험실에 잠까 동안 머물게 했다. 그 후 티셔츠를 입은 학생에게 물었다. "그런 티셔츠를 입은 걸 몇 명이나 알아차렸을까?" 아마도50 퍼센는 될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23퍼센트의 학생만이 그 티셔츠를 기억해 냈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 p121 -
"나이 들수록, 노년이 될수록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체력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잘 죽기'위해서다. 나는 미국의 위대한 사상가인 스콧니어링의 삶을 흠모한다. 죽는 순간까지 부인 헬렌과 함께 조화롭고 충만한 삶을 실천해 온 그의 <스콧 니어링 자서전>은 늘 가까이 꽂아두고 인생 공부로 뒤적이는 책이다.
...
100 세가 된 스콧 니어링은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감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어, 아내 헬렌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극히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어느 정도의 절제력과 맑은 정신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지금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강한 체력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나이 들면서 잃을까봐 두려운 것은 돈이 아니다. 존엄, 우아, 품위, 독립, 자율, 위엄, 존경이다. 육체의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주체할 수 없을만큼 급속도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비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내 생명 끝나는 그날까지는 내 의지로 잘 살다가 마무리하고 싶다. 불의의 병과 사고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건강한 체력은 내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닌가. 내가 다져온 체력은, 남은 인생은 물론 죽음까지도 완전히 달라지게 할 것이다"
-p263
'BookBook-100자 서평 > 202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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